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고둔 사건 (문단 편집) === 일본의 반응과 내부사정 === 사건을 전해들은 만철의 야마모토 총재와 다나카 총리는 장쭤린을 이용하여 만주에 권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장쭤린의 죽음에 큰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6월 4일, 하야시 규지로 총영사는 "범인:이번 폭파 사건은 그 결과에 비춰 판단하건대 규모가 상당히 크고 게다가 충분한 준비를 거쳐 실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하고 <장쭤린 폭살 사건 임시 조서>란 제목의 전보를 보냄으로 관동군의 범행임을 의심하는 암시를 넣었다. 봉천 영사관 쪽도 현장을 둘러보고 이것이 관동군의 소행이란 심증을 굳혔다. 하지만 관동군은 장제스를 핑계대며 발뺌했다. 6월 4일 사이토 히사시 참모장은 육군차관 하타 에이타로에게 "본일 5시 30분경 장쭤린이 탄 것으로 보이는 열차가 황고둔 역을 지나 남만선 교차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남방파 편의대로 보이는 자들이 운행 중인 열차를 폭격하여 장쭤린과 우쥔성 등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그 외 몇명의 사상자가 있었다. 한편 지나위대(관동군)는 같은 장소 부근으로 가 편의대로 보이는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지만 아군과는 하등의 사고를 낳지 않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같은 날 보낸 극비전문에서 사이토 참모장은 '편의대로 보이는 이들'을 어느새 편의대로 단정하였다. 일본 육군성은 이를 바탕으로 오전 10시 30분 "어떤 사람이 심양역과 봉천역 사이의 교차점에서 장쭤린이 탄 열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장쭤린과 우쥔성은 경상을 입었고 몇 사람이 사망하였다. 경비대가 즉시 출동하여 현장에서 도주하던 편의대원을 사살하였다.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는 그 어떤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란 성명을 발표했다. 오후 5시 24분, 사이토는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상에게 보낸 전문에서 [[도이하라 겐지]] 대좌를 보내 장쭤린을 문병했다는 거짓 전문까지 보냈다. 사이토 히사시 참모장은 또한 장쭤린의 비서인 도상명을 만나 남방 간첩들의 행위임을 주장했고 이후에 일본은 이 주장을 고수하면서 잡아뗐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도 장쭤린의 암살이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유력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했고 장쭤린에 대해서 그가 일본에 우호적인 지도자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6월 7일 전문에서 관동군은 여전히 장제스 아니면 장쭤린의 심복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수뇌부가 [[고모토 다이사쿠]]를 도쿄로 소환하여 심문했을때, 고모토 다이사쿠는 사이토와 같은 주장을 펼치며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육군 수뇌부는 고모토를 더 추궁해서 만약 일본의 소행이라고 밝혀지면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고모토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다나카 총리에겐 고모토의 주장을 기반으로 쓴 보고서를 올렸다. 이렇듯 일본 육군 상층부가 내막을 숨기려 애썼으나 헌병대 사령관 미네 유키마쓰의 조사와 민정당의 추궁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도 차차 이 사건이 관동군의 소행이란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9~10월이 되면 다나카 총리와 시라카와 육상을 비롯한 일본 정부도 내막을 알게 되었다. 다나카는 범인을 벌하여 규율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으나 각료와 육군이 반대했다. 시라카와 육상과 철도상 오가와 헤이키치는 다나카를 공박하며 사건을 공표하는 것이 황실에 해롭고 중일관계의 악화를 가져와 일본의 이익에 손해라고 주장했다. 다나카는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사이온지 긴모치]]의 지지를 받아 일을 추진하였다. 다나카는 12월 24일에 위의 내용을 상주하여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와 소수인원이 저지른 일이라며 범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육군을 숙정하며 규율을 바로잡을 것이라 했다. 12월 25일, 다나카는 마키노 노부아키와 진다 스테미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 여겨 그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각료들은 군법회의에 반대하며 군행정상의 사건으로의 처리를 요구했다. 12월 28일, 시라카와가 육군이 조사하겠다고 상주했으나 군법회의는 언급하지 않았다. 1929년 56차 제국회의에서 사건을 짐작하던 민정당은 군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사건에 대한 해명을 정부에 추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를 비판하는 데에는 쓰인 것으로 보인다.] 1929년 1월 17일, [[쇼와 덴노]]는 시라카와에게 사건을 조사하도록 조사했고 1월 19일에 다나카에서 의회 대책 방침을 물었다. 2월 2일, 쇼와 덴노는 다나카에게 조사 진행을 물었고 다나카는 내각이 장쭤린 암살 사건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결국 쇼와 덴노는 다나카에 대한 신임을 거두어 버렸고, 다나카는 궁지에 몰려 결국 자신이 양보해 육군을 돕는 것만이 살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각은 사건을 은폐하여 행정문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3월 27일 시라카와가 내각의 결정을 쇼와 덴노에게 보고하여 무라오카 조타로와 고모토 다이사쿠가 죄를 지었으나 사실을 공표하고 책임을 물어 엄벌에 처하면 국익이 침해된다고 보고했다. 쇼와 덴노는 이에 동의했다. 허버트 빅스는 이 결정이, 쇼와 덴노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침략을 꾀하려는 세력을 부추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다나카 기이치는 무척이나 완화된 처벌 결과에 대해 쇼와 덴노에게 상주하며 이를 무마하겠다고 했는데 이때 쇼와 덴노가 분노하여 다나카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정우회 내각은 붕괴되고 다나카는 쫓겨났다. 이로서 [[하마구치 오사치]]의 민정당 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쇼와 덴노는 독백록에서 이를 젊은 혈기의 소치라 변명했지만 허버트 빅스는 이를 구차한 핑계로 치부하며 다나카가 쫓겨난 것에서 장쭤린 암살은 구실에 불과하고 다나카가 쫓겨난 이유는 다나카가 무능해보였으며 덴노를 우습게 알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